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르샤바 봉기 (문단 편집) === 소련군의 역할에 대한 의문 === 소련군은 봉기 기간 동안 바르샤바 봉기군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았다고 알려졌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폴란드를 소련의 위성국으로 만들 생각을 하고 있었고 이미 폴란드의 공산 정권을 만들 인사들을 모아놓은 상태였다. 나중에 소련군 군용열차를 타고 들어온 이 폴란드 공산당을 두고 서방에서는 "화물 열차 정권"이라 비웃었다. 스탈린은 연합군의 수송기가 봉기군을 지원하도록 소련 영토에 이착륙하는 것을 거부했다. 스탈린에게 있어 바르샤바 봉기를 지원한다는 것은 '''자신의 정당한 전리품을 빼앗는 일'''이었다. 더구나 러시아 제국과 소련의 역사를 보더라도 그들의 지배하에 있지 않은 폴란드는 위험한 존재이기도 했다. 따라서 소련과 직접 맞닿아있지도 않은 유고슬라비아의 경우와는 비교하기 어렵다. 다만 이런 스탈린의 태도와 별개로 소련 공군이 봉기군에게 물자는 지원했고, 소티는 많았지만(2,000소티) 봉기군에게 직접 전달된 물건은 얼마 없었다. 한편 냉전이 끝나고 공개된 문서들에 의해서 실제로는 당시 소련군이 바르샤바에 진격하는 것이 '''군사적으로도 불가능했음이 밝혀졌다.''' 소련군이 언제든지 바르샤바를 들이칠 수 있을 것처럼 압도적으로 보였던 것은 사실은 상당부분 스탈린의 허세였고, 실제로는 스탈린은 '''바르샤바 봉기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소련군에 바르샤바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하달했지만 재편성된 독일군의 파쇄공격[* 기동방어의 일종으로, 적군이 공격준비를 마치기 전에 선제공격으로 격파함으로써 적군의 공세역량을 분쇄하는 것이다.]에 오히려 격파당했음이 드러났다. 당시 전세는 이미 소련에게 완전히 기울어져 있었지만, 소련의 붉은 군대는 바르샤바 근교에서 공세 한계점에 다다르고 있었다. 게다가, 당시 소련군을 상대하던 독일군 사령관은 2차대전 최고의 방어전 사령관인 [[발터 모델]]이었다. 그는 무너진 나치독일의 동부전선을 재건했고, 폴란드 인근에서 소련군에게 역습을 날려 동부전선의 수호자로 불렸다. 나치독일의 생명연장에 지대한 공을 세운 승리였지만 폴란드에게 있어서는 크나큰 아쉬움으로 남을 지점이다. [[바그라티온 작전]]이 개시된 지 약 1달 정도 지난 1944년 7월 22일 시점에서 바르샤바 방면의 선봉인 소련 제2 전차군은 810량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제2 전차군은 적어도 7월 27일 시점에는 바르샤바를 향해 급속히 전진하여 바르샤바에서 북동쪽으로 고작 25km 정도 떨어진 오쿠니에프(Okuniew)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8월 1일 경 중부집단군 사령관인 [[발터 모델|모델]] 원수가 끌어다 모은 4개 기갑사단을 직접 지휘하여 바르샤바 전면에서 치열한 전차전이 벌어졌다. 사투 끝에 제2 전차군은 포위섬멸당하는 최악의 상황은 모면했지만 심각한 타격을 입어 263량의 전차만이 남았고 8월 5일에 전선에서 후방으로 철수했다. 이처럼 바르샤바 초입에서 대규모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소련 지휘부가 의도적으로 도시 점령을 늦췄다 볼 근거가 빈약하기는 하다. [[콘스탄틴 로코솝스키]]가 이끄는 소련군은 [[바그라티온 작전]] 이후 예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거리를 매우 빠른 속도로 지나쳤고 그러다보니 전력 재정비도 제대로 하지 못했으며[* 심지어는 병력의 대부분이 정원수에 못미쳤고, 증원 병력의 대부분은 전투 도중 소련군이 '해방'한 지역에서 충원되었다.] 보급도 매우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어느정도로 심각했냐 하면 '''전차가 철갑탄이 없어서 적 기갑차량을 고폭탄으로 상대해야 했을 정도이며 그 반대의 경우로 고폭탄이 없어 동축기관총 하나로 적 벙커를 부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그라티온 작전에 연이은 공세의 마지막에 바르샤바라는 무리한 목표가 하달되어 [[공세종말점]]을 지나치게 되었고, 그 결과 독일군의 반격으로 오히려 수십km를 밀려나 방어에 급급한 상태에 몰리게 되었다. 이 때문에 소련은 봉기군에게 지원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실제로 소련이 다음 공세인 [[비스와-오데르 대공세]]를 펼 수 있었던 것은 봉기가 끝나고도 3달 이상 지난 후였다.[* 소련의 목표가 애초에 폴란드 공산정권 수립이었기 때문에 봉기군과 소련군이 양동으로 독일 식민지역 사령부를 파쇄하더라도 소련은 이들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이 공산당 지지자였다면 지역 정치장교 세력으로 키웠을지언정 절대 독자정부 수립은 해주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실제 역사처럼 바르샤바가 처참하게 박살나고 시민들이 학살당하지는 않았을테니 그나마 상황이 양호하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부르자 작전 당시 실제로 전쟁 전 폴란드 제 3의 도시였던 르부프, 즉 현대 우크라이나의 [[르비우|리비우]]는 폴란드 국내군이 구상한 그대로 내부 봉기에 의한 선 해방->소련군 진주로 독일군 축출이란 이상적인 과정을 통해 해방되었지만 남은 폴란드 국내군은 싸그리 적성 세력 취급받아 굴라그로 끌려 가거나 반소 게릴라로 쫒기고 도시는 열강들의 땅따먹기로 현대까지 우크라이나쪽으로 넘어가는 신세가 되었다.] 즉 결론을 내리면 소련군에게 바르샤바 봉기군을 도와줄 여력이 부족한 상황이 공교롭게도 마침 개입할 의지가 약했던 스탈린의 의도와 맞아떨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재조명이라는 다큐에서는 이 당시 스탈린의 의도를 극명하게 표현했다. '''독일군은 독일군대로 피해를 입고 친서방 폴란드 봉기군은 진압 및 괴멸당할테니 결과적으로 스탈린만 이득을 얻는 싸움이었다고. '''] 봉기 시점에서 소련군의 바르샤바 해방 가능 여부 또는 스탈린나 의사와 결정에 관한 의문은 러시아 측 자료로 명백한 답을 내릴 수 있지만, 아직까지는 완전한 접근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전진 중지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것과 별개로 바그라티온 작전 종결 단계에서 스탈린과 소련군의 작전 지휘를 비판하는 견해도 있다. 작전 마무리 단계에서 스탈린은 하나의 방면에 병력을 집중하기 보다는 폴란드 북부의 비스와 강 하구와 발트 해 방면, 중부의 바르샤바 방면, 남부의 리보프 및 루블린 방면으로 공세를 분산시켰고, 압도적인 전력을 투입했음에도 독일군 전선을 완전히 붕괴시키지 못해 중부집단군이 전선을 다시 안정화시키는 것을 허용했다는 비판이다. 이 같은 견해에 따르면 소련군의 바르샤바 방면의 진격은 너무 늦게 이뤄졌고, 동원 가능한 병력 중에서도 일부만이[* 즉 바르샤바 공격에 800대의 전차가 아니라 8천대 이상의 동원이 가능했다 추산한다. ~~독일군 다 죽겠다 이놈들아~~ 지나치게 결과론적이다는 견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실제로도 공세를 분산시킨 결과가 영 신통치 않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동원됐다고 비판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